프롤로그.
좋은 영화중에는 참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많다. '이터널 선샤인'도 마찬가지다. 짐캐리를 좋아해서 개봉을 기다리지 못하고 컴퓨터로 보았던 그 영화를 오늘 다시 봤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또 두번째 보게 되었던지라 많은 생각을 하면서 보게 되었다. 왜 우리는 이별에 아파하는가? 그리고 그렇게도 아플 때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과거의 존재방식.
존재라는 것은 시공간으로 전제된다. 따라서 과거는 존재할 수 없다. 존재하는 것은 현재뿐이다. 과거는 이미 사라졌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는 과거의 연장선이다. 과거의 존재 없이 현재는 존재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거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우리는 지난 날을 기억해낸다. 기억해내서 실실 쪼개던 질질 짜던 그 기억들은 현재라는 기점에서 소환되어 온다. 그렇다. 과거는 현재에서 존재한다. 인간의 기억이던, 어느 일기장이던, 사진이던간에 자신을 탈바꿈할 무엇을 빌려서 말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및 조연들은 기억을 지워버린다. 물론 그를 추측할 수 있는 추억이 담긴 모든 물건들도 버려버린다. 과거는 더 이상 빙의할 수 없다. 자신의 존재가 투여된 물건, 기억들이 모두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그들은 과거를 되풀이한다.(물론 여기에는 전제조건이 있다.) 조엘은 클레멘타인을 다시 만나고, 메리는 박사를 다시 사랑한다. 과거가 없기에 현재는 존재하지 않고 그 들은 현재에도 과거를 되풀이한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조엘이나 클레멘타인. 사랑했다가 아파하는 모두는 기억에, 과거에 몸서리 친다. 그 기억이 끔찍해서?? 아니다. 그 기억이 너무나 행복했기 때문이다. 그 행복이 다시 올 수 없다는 생각에 그 들은 힘들어한다. 함께한 추억이 담긴 물건이나 기억들은 행복하지만 빙의된 행복은 현재에선 존재할 수 없다. 과거의 존재를 표현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들은 그 것들을 없애버린다. 지난날도 외로웠다고, 행복하지 않았다고 바꿈으로서 행복의 사라짐을 아파하지 않을 수 있다. 존재하지 않았던 거니까 지금 없다 한들 아파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그 들은 다시 만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앞서 과거를 되풀이 한다고 말하였지만 나는 과거로 돌아갔어도 세계는 이미 현재이다. 무엇이 그 들을 다시 만나게 한 열쇠가 되었는가? 그 것은 그 들의 감정이다. 기억을 지우면서, 그 기억을 지우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사랑했던 이를 망각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를, 기억은 지워졌더라도 존재하는 기억을 지우는 아픔이, 그 때의 과거가 감정에 의해 의재되었기 때문이다. 기억으로 존재했던 과거가 존재했음을 감정이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들은 뭔가 시린 가슴으로 출근도 안하고 몬톡으로 향한다.
나의 아픈 기억.
뭐 나야 짝사랑 전문이라서 연인간의 이별에 대한 아픈느낌은 되짚기 깜깜하다. 앞서 말했듯 존재했던 것은 알지만 그 아팠던 기억을 지금 불러내서 느낄 순 없다. 그런데 재밌는 건 짝사랑도 아프다. 그 아픈 이유중에서 짝사랑을 포기해야 할 때는 대게 과거를 포기해야 할 때가 대부분이다. 거절을 당할 때나, 혼자 스스로 마음을 접을 때나, 과거때문에 아프다. 과거의 기억에선 할 수 있었던 것이, 존재했던 것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경우 그 대부분은 희망이었다.
우리는 끝없는 시간속에 존재한다. 1초와 2초는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이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는 지워질 수 없다. 어떠한 형식으로든 과거는 자신의 존재를 현재에서 표출한다. 인간은 그를 인식하며 현재를 살아간다. 끊임없이 이어진 그 시간들 속에서 말이다. 내가 사랑했던 누구. 행복했던 기억. 그 것들이, 과거가, 가슴을 조여온다고 해도 견뎌내야 한다. 피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과거가 현재를 존재케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그 후에 새로운 현재를 살아낼 수 있다. 계속 사랑하건, 아파하건, 잊건간에 말이다. 영화에서 기억을 지우기전에 클레멘타인이 녹음했던, 조엘이 녹음했던 테잎(그 테잎엔 이별 쯤에 느꼈던 서로에 대한 미움과 증오가 녹음되어 있다.)을 서로 듣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들이 과거를 되풀이 하지 않고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난 과거를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존재를 망각할 순 있어도, 부정할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