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형도 나 못지 않게 말싸움을 좋아한다. 요새 들어 형과 주로 논쟁하는 것은 1+1=2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의미가 있느냐라는 것이다. 수학을 전공한 우리 형에게 나는 1이라는 개념자체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의제하는 것이며 결국 숫자의 덧셈 자체를 증명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 한다. 그 것 자체, 그러한 공식은 이미 의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존재를 항상 2분법의 방법으로 인식한다. 내부와 외부를 만들고 그 내부나 혹은 외부의 존재를 규정한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선 내가 아닌, 나의 밖의 것들을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에겐 1이라는 수가 있어 2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를 파악하기 위해서 두 가지, 외부와 내부, 2라는 것을 가정하여 1을 도출한다. 아니 정확히는 2와 1은 동시에 표출된다. 외부와 내부를 가르는 순간, 존재가 탄생하고, 존재가 탄생하는 순간 외부와 내부가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외로워 진다. 너라는 사람은, 나아닌 모든 것은 이미 내가 아닌 존재로 나에게 선험적으로 각인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재를 인식할 수 밖에 없는 수많은 인간은, 나는 고립되어 버린다. 인식이 곧 고립이 되는 것이다.
외로운 인간들은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2분법으로 존재를 인식하는 전제하에서 존재하지만 내가 절대 될 수 없는 외부를 내부화 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이성을 사랑하고, 친구를 사귀며, 자연을 느끼려고 한다. 하지만 결국 그런 일련의 과정은 항상 상처를 입게한다. 존재라는 것은 모든 사물의 특성, 형식, 움직임에 선행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들을 뛰어 넘어도 내가 아닌 다른 존재, 내가 될 수 없는 존재라는 벽은 절대 뛰어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싯다르타는 말한다.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너를 버리라고.'
싯다르타의 요구는 너무 어렵다. 나를 버리기 위해선 나의 존재도 버려야 한다. 물론 나의 존재를 버리는 순간 나 이외의 존재도 사라지며 나와 나의 외부를 규정짓는 벽은 허물어진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을 버리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인간은 자신의 유일성에서 세계를 지배하려고 하고, 존재하려 한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코기토를 외치게 되는 것이다.
아쉽게도 당신이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거나 존재에서 자유로워지길 원하지 않고서는 당신의 삶에 항상 따라다니는 외로움은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의 외로움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에 기생하며 절대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두가지 방법을 택하게 된다. 하나는 플라톤처럼 외부 존재를 전부 부정하는 이데아를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포이에르바하처럼 내 안의 관념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가지 방법 모두 실패하였다. 플라톤은 몽상가가 되버렸고, 바하는 물건이 되어버렸다.
어쩔 수 없다. 외로움을 그냥 받아들이던가 아니면 나를 지울 수밖에, 버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유치한 삼류 연애극에서 사랑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는 찌질한 로맨티시스트들을 욕할 수 만은 없게 된다. 그 들의 외로움은 적어도 사라졌을테니까.